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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영씨를 보내며

나보다 한살밖에 안어린 그가 꼭 나를 부를때 '누님'이라고 했다. 누나도 아니고 누님. 
다들 그를 오실장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를 꼭 '재영씨'라고 했다. 이상하게 그에게는 그렇게 부르고 싶었다.


2003년 처음 중앙당에 뻘쭘한 자리로 불려갔을때 이쪽도 저쪽도 특별히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을때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고 챙겨줬다. 2004년 당의 첫 원내진출 후에 최고위원이 되어 이라크 파병 사건이 터졌다. 무지하게 더운 여름 광화문 열린공원에서 26일 단식을 하며 투쟁을 이끄는 책임을 맡았다. 그때 나는 오재영과 함께 일했다. 뒤늦게 당에 합류한 나에게 그렇게 오재영은 내 첫번째 사수가 되어 주었다.


2008년 당이 쪼개지고 그와 나는 이쪽 저쪽에 갈라져 살았다. 총선에 나가 거리에서 욕도 태바가지로 먹어도 보고 일이 시들하고 재미없을 때쯤. 그에게 전화를 했다. 하동에 조승범이 요양하고 있는데 다들 거기 모여있다고 놀러오라고 했다. 차를 돌려 무작정 하동으로 달렸다. 거기에 황이민도 있었다. 종일 하투치고 놀다가 먹다가. 그리고 밤이 되어 조승범이 아파서 투석을 받는데 너무 속상하고 신경질이 나서 울음이 터졌는데 알고보면 우리 처지가 서러워서였다. 오재영이 밖으로 나와 내 등을 두들겨 주었던 기억이 난다. 조승범은 그후 생을 달리했다.


그가 다시 돌아왔다. 노회찬의 귀환이 그를 다시 불렀다. 어제 그의 부인이 당에서 일하는동안 쌓이고 해결못한 대출 갚느라 일을 떠나있던 그가 대출하나 갚던 날, 다시 노회찬을 도우러가도 되냐고 물었다고 했다. 몇년동안 얼마나 고단했을지 그 마음을 조금 알것같다. 항상 넘쳐나는 일로 문자를 주고받던 그가, 설날 아픈 다리 다 나았냐고, 설연휴는 푹쉬라고 했다. 나는 다리 다 나으면 진짜 쏘주한잔하자고 했다. 그놈의 쏘주는 다른 사람하고 다 마시면서 결국 그와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이제서야 우리사이에 그 이상한 담벼락 같은거 없이 진짜 동지가 되어, 바라고 바랬던 진보정치의 꿈을 펼칠수 있게 되었는데. 그 꿈을 더이상 그와 나누지 못한다고 생각이 드니 가슴이 아리다.

어제 권호씨가 저 세상에 같이 만나 거기서 우리 집권하자,고 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았다. 그런 절실한 마음으로 살았다.


이제 그없는 세상이 조금 쓸쓸하겠지만.
어떻게 잊겠나. 포기하겠나.

우리가 꾸어왔던 꿈. 실패속에서 단단해져 온 그 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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